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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Masquerade







1.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한 지중해의 한 섬. 그러나 나날이 높아져만 가는 범죄와 실업률에 의회는 골머리를 썩혔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1년에 한 번, 모든 공권력이 무력화되는 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의회는 이 안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시민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 건은 80% 이상의 찬성표를 얻고 가결되었다. 발표가 난 직후 범죄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이는 곧장 생산성으로 직결되었다. 근본적인 문제-빈부격차 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지만! 


 ≪퍼지타임≫이 시작되자, 가면을 쓴 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모든 공권력이 사라진다 해도 대상은 자신의 친구며 이웃이었다. 가면 아래 숨은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가게를 부수고 사람을 찔렀다. 거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퍼지데이에 가장무도회Masequerade 라는 애칭이 붙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2.


 가면을 쓴 자들ㅡ이하 마스크Masque들은 저들끼리 조직Gang을 이뤘다. 괴기하게 생긴 동물 가면을 쓰고 다니는가 하면, 퍼레이드 복장에 가깝게 헐벗고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집을 털고 불을 질렀다. 서로의 구역을 놓고 싸우는 일도 벌어졌다. 어떤 조직은 다른 조직을 먹고 먹어서 이윽고 세이프존을 넘보기 시작했다. S.E.P.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으려 들었지만 그들의 세는 점점 커져만 갔다. 퍼지데이가 격렬해질수록 재범률은 낮아지고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다. 




 3. 


 한 해 사상자가 세 자릿수가 넘어가서야 의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러나 쉬이 퍼지데이 폐지안을 상정할 수는 없었다. 역대 최저 실업률, 재범률. 관광 도시라는 이미지까지 겹쳐 관광객과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다. '살기 좋은 도시' 로 표창까지 받은 상태에서 의원들은 서로의 밥그릇을 챙기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의원이 용기를 내어 퍼지데이 폐지안을 의회에 올렸다. 의논은 길어졌다. 대개 봄에 일정이 잡혀있던 퍼지데이는 회의가 길어져 감에 따라 계속 늦춰졌다. 숨겨져 있던 시민들의 폭력성이 시나브로 나타났다. 여름의 끝물. 기어이 의회를 향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그들은 서둘러 결론을 냈다. 당연히, 안건은 부결되었다. 간발의 차였다. 섬은 안도했다. 


 또다시 퍼지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